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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생사회(머리와 손발의 소통 이야기)

저자 : 이덕희
발행일 : 2020-09-23
ISBN-13 : 979-11-87897-97-2
판형 : 신국판형
페이지수 : 424 쪽
판매가 : 18,000 원

 

들어가는 글

선비, 구름 위에서 내려오다  

 

 

 

어릴 때부터 아무개 머리 참 좋다라는 말을 참 많이 듣고 자랐다. “누구누구는 손재주가 좋다라는 말보다 많이 들었다. , 친척, 동네나 할 것 없이 머리 좋은 형은 늘 닮아야 할 우상이었다. 그런데 사회에 나와보니 그렇지 않았다. 손가락이 각자 재능이 다르지만 서로 조화를 이루어 손의 기능을 발휘하듯이 사회도 머리 좋은 사람, 손재주 좋은 사람 등 재능이 다른 많은 사람들이 서로 조화를 이루며 만들어가고 있었다. 또 많이 들었던 것은 아무개는 부잣집 애다라는 말이다. 부잣집은 선망의 대상이었고, 누구나 부자가 되려고 부지런히 일하였다. “아무개는 공부는 별로 못했는데 요새 돈 잘 번다더라라는 말도 많이 들었다. 어렸을 때 공부는 좀 못해도 나중에 돈을 잘 벌면 용서가 되었다. 공부를 잘하거나 돈을 잘 벌면 세칭 출세하므로 모두 거기에 매달렸다.

그런데 이 둘은 근래 와서 서로 삐거덕거린다. “옛날에는 부잣집 애들이 공부는 별로였는데 요즘에는 공부도 잘하더라”, “개천에서 용 난 지 오래되었다”, “금수저, 은수저, 흙수저”, “아무개 건물주가 되었다더라.” 머리 좋은 사람은 세상 물정 모르고 지적 폭력을 휘둘렀고, 돈 많은 사람은 절제 없는 탐욕을 부렸다. 우리의 의식은 선비에 있는데, 현실은 사업가의 세상이 되어가고 있었다. 결국 어릴 때 많이 듣던 머리 좋은 애부잣집 애간에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가의 문제이다. 역사적으로는 농공상의 조화이며, ‘머리의 세계손발의 세계간 소통 문제이기도 하다.

돌이켜보면 우리는 손발을 별로 대접하지 않았다. 머리처럼 손발을 존중하며, 또 서로 상대방 안으로 들어가 소통했어야 하였는데 그러지 못하였다. 인문계 고등학생과 4년제 대학생은 고개 들고 다녔으나 실업계 고등학생과 전문대생은 고개 숙이고 다녀야만 하였다. 왜 그렇게 머리와 손발은 멀어지게 되었을까? 이제 그 궁금증을 풀어보려 한다. 너무 가까이 있어 잘 몰랐지만, 부지불식간에 우리를 근본적으로 지배하는, 머리 중시의 DNA를 확인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DNA를 찾아 거꾸로 시간여행을 해보고자 한다. 먼저 조선 말에서 일제강점기까지 가보고, 그다음 더 거슬러 조선시대를 본 후, 다시 훌쩍 뛰어 현대로 오는 여정이다. 아직도 진행형인 머리에 대한 손발의 반란 여행이다.

반란의 시작은 실학이었다. 유교 도덕성의 공허함을 뼈저리게 반성한 내생적 몸부림이었지만 실학은 결실을 보지 못하고 반란에 그쳤다. 거대하게 밀려오는 서쪽 바람에 불가피하게 편승하기 위하여 동도서기東道西器를 내세웠지만, 이 또한 머리 따로 손발 따로의 모순만 드러내고 결국 나라를 잃어버렸다. 제국주의 야욕이라는 외부적인 요인도 있었지만, 환경 변화를 기회로 활용하지 못한 우리 내부의 요인이 컸다. 대대로 인간 도덕심에 너무 낙관적으로 의존한 탓이다. 원리적이고 관념적이어서 구체적인 사물의 세계는 애써 멀리하였다. 부국강병은 요원하고 양반 문치 카르텔과 사농공상의 서열만 공고해져 갔다.

세상 변화를 읽지 못하고 일제강점기라는 암흑기를 맞이하였고, 모든 것을 주체적으로 할 수 없는 자기 모순의 시련을 겪어야만 하였다. 해방 이후 눈을 떠보니 세상은 저만치 가 있어 따라잡기 위하여 열심히 살았다. 나름 성공적이었고 대견하였다. 그러나 남들이 오랜 시간 이루어 놓은 것을 빌려 과속으로 달려온 나머지 군데군데 허술한 데가 많다. 대나무 마디처럼 제대로 매듭짓지도 못하였다. 이제 막상 앞에 아무도 없는 길을 가려 하니 두렵고 마음처럼 되지도 않는다.

실학은 여전히 미완의 과제로 남아 있다. 동서고금은 매듭을 제대로 지으려면 머리의 세계와 손발의 세계가 서로 밀고 당기는 과정이 필요함을 일러준다. 그러나 머리가 앞서고 손발이 따라가는 세상을 오래 살아온 나머지 손발의 세계가 무너져 균형을 잃어버렸다. 이제 머리에서 아래로 내려가 손발을 일으켜 세워 서로 소통하며 가야 한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천천히 가야 갈 수 있는 길이다.

이미 우리는 손발에 대한 푸대접으로 많은 비용을 치르고 있다. 바로 필자가 이 책을 구상하게 된 현실적인 이유이기도 하다. 세 가지 질문이 있다.

첫째, 정녕 우리에게 도덕적 자본주의는 불가능한 것인가? 부동산과 학벌에 대한 집착은 굳건한 양반 문치 카르텔과 사농공상 서열이 우리에게 물려준 유산이다. 그 배후엔 쉽게 부귀영화를 누리겠다는 욕망이 깔려 있다. 한번 이루어진 성취를 별 노력 없이 계속 누리고자 하는 의식은 강남불패 신화와 대치동 불빛으로 현현하고 있다.

둘째, 재난은 왜 계속 되풀이되는가? 성수대교 붕괴, 삼풍백화점 붕괴, 세월호 침몰 등 그렇게 뼈에 사무치게 겪고도 계속 되풀이되고 있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는 속담이 무색할 정도로 잊을 만하면 다시 나타나 우리의 자존심에 깊은 상처를 남긴다. 소 잃고도 외양간 고치지 않는 안전불감증이 오늘도 뉴스를 장식하고 있다.

셋째, 혁신은 우리 곁에 있는가? 그동안 캐치업 경제에서 혁신경제로 이전하기 위하여 엄청난 연구개발비의 마중물을 부었는데도 물이 시원하게 솟구치지 않는다. GDP 대비 연구개발비, 연구원 수, ICT 인프라 등 투입 면에서는 뛰어나나 기술 이전, 창업 활동, 지적재산권 보호 등의 산출 면에서는 많이 뒤처져 있다. 우리 경제의 미래가 걸려 있는 절박한 상황인데도 혁신의 투입과 산출 사이가 여전히 블랙박스다.

필자는 이런 당면 문제들이 사회 곳곳에서 일을 제대로 하지 않아 발생한 것으로 보고, 이를 내생성부족이라는 좀 거창한 말로 표현하였다. 내생성이라는 것은 한마디로 표현하기 어렵지만 스스로 뿌리를 내리고 싹을 틔우는 것이라 얘기해도 좋을 듯하다. 그리고 내생성은 손발과 머리가 상호 작용하면서 서로로부터 검증받는 과정에서 자라난다고 생각하고, 그런 사회를 내생사회로 명명하였다. 필자는 이 책에서 우리는 왜 그동안 내생성이 결여된 사회가 되었는지에 대하여 부족하나마 일관되게 증명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마지막에 내생사회로 가기 위해서 지금 시점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제안하면서 마무리하였다.

필자는 경제학을 전공하였지만 다른 학문에도 관심이 많아 인문학, 자연과학 등에도 기웃기웃하면서 소위 융합 학문을 하고자 노력하였다. 그런 차에 2015년에 공자가 다시 쓴 자본주의 강의라는 책을 내었다. 그 책에서 자본의 논리와 자본의 윤리가 공존하는 도덕적 자본주의가 가능한가에 대한 질문에 대한 답을 우리 유학의 인사상에서 찾아보려고 하였다. 당시 집필 과정에서 양자 간에 내생성이라는 연결고리가 희미하게 보였다. 도덕성이 구호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자기 일에 지성至誠을 하면 저절로 깃드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였다. 거기에 힌트를 얻어 이 책의 집필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아무튼 우리나라가 실력 있는 탄탄한 나라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에서 학문 영역과는 상관없이 자유롭게 평소의 생각을 정리하였다. 또한 코로나19 확산이라는 사상 초유의 사태가 새로운 도약을 위한 구조조정의 소중한 기회라는 점에서 그 방향 설정에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그래서 조선의 선비들이 구름 위에서 내려와 진정 실사구시實事求是를 할 수 있게 되기를 소망한다.

이 책을 시작하기 전에 몇 가지 독자들의 양해를 구하고자 한다. 첫째, 유학의 리와 기는 매우 심오한 다층적 의미를 지닌다. 또 시대 상황과 화자에 따라 그 의미가 변해 왔다. 그럼에도 본서에서는 이와 기이론과 실제로 다소 좁게 보고 전개하였다. 비전문가로서 동양 철학의 심오한 측면을 단순화시킨 점에 대해 관련 전문가들의 애정 어린 양해를 바라고 앞으로 더 깊은 공부로 대신하고자 한다.

둘째, 이 책은 거시적·평균적 관점에서 기술되었다. 예를 들어 양반과 중인의 교류가 미약하다는 것은 당시 조선 사회의 일반적인 상황을 얘기한다. 물론 양반과 중인 간에 상당한 교류를 한 경우도 있다. 그러나 여기 기술은 일반적인 상황을 염두에 두고 기술하였음을 밝힌다.

셋째, 되도록 객관적 자료에 의존하여 기술하려 노력하였다. 그렇지만 객관적 자료에 의존하더라도 과거 사실이 명백하지 않고 필자들의 해석에 좌우되는 경우가 많다. 필자도 예외가 아니어서 상상력을 동원하여 자의적으로 해석한 경우가 많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너그러이 이해해주기를 바란다.

마지막으로 이 책이 나오기까지 애정과 수고를 아끼지 않으신 율곡출판사의 박기남 대표님, 박정헌 상무님, 차은지 선생님께 깊은 감사의 말씀을 올린다.

 

2020년 지루한 장마의 끝자락에서

이덕희

 

 첫 번째 외생사회의 단면들

01 널뛰기 사회

02 하버드 PC

03 캐치업 DNA

04 멀고 먼 소재·부품·장비 국산화

05 건물주가 꿈 

06 가방끈이 길어야 

07 염불보다 잿밥 

 

 두 번째 동도서기

01 실학, 내생사회의 맹아 

02 군함의 충격과 동도서기

03 서양 문물의 외형적 수용

04 일제강점기, 내생사회의 좌절

 

 세 번째 원리적 유교사회

01 관념적 도덕주의

02 고전 중심의 학문 방법

03 사농공상

 

 네 번째 내생성이란?

01 중용의 지성 

02 화이트헤드의 과정철학 

03 복잡계와 자기 조직화 

04 내생적 발전 

05 내생성의 조건 

 

 다섯 번째 내생사회   

01 관계보다 내력

02 사람보다 일

03 교실보다 현장

04 서울보다 지방

 

나가는 글 하학을 다시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