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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크리토 -일본건축문화독법

저자 : 이종욱
발행일 : 2020-07-15
ISBN-13 : 979-11-87897-92-7
판형 : 신국판
페이지수 : 310 쪽
판매가 : 18,000 원

들어가는 글 

 

 

건축, 무한 다면체

 

입방체-주사위는 여섯 개의 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건축은 무수한 개수의 면을 가진 입체와 같습니다. 건축이 지닌 의미에서 그렇습니다. 양파 껍질처럼 그 속에 또 다른 차원의 읽을거리가 있기도 합니다. 여기에는 역사, 경제, 문화 등 인간의 삶과 관련된 모든 층위의 텍스트가 포함됩니다. 이것들이 겹쳐 씌어 있다고 말할 수도 있고 다의적이라는 표현도 가능합니다. 그런데 이런 복합적인 의미의 상관성은 건축의 해독을 어렵게 합니다.

그 복잡성을 이해하지 못한 우리에게 건축은 매우 단순해 보입니다. 건축은 용도와 법에 의해 규모와 기본 조형이 확정되고, 건축가의 개인적인 미적 취향에 힘입어 탄생하는 공간에 불과한 것일까요. 또는 인류 역사와 병행하는 변증법적인 발전 과정을 거쳐서 생성된 형식으로, 연구의 대상이 되는 고결한 존재가 건축일까요.

1980년대 포스트모던의 끝자락에, 건축과 철학을 가장 강고하게 결부시켜 명성을 얻었던 미국의 건축가이자 건축 이론가인 피터 아이젠만Peter Eisenman, 1932~2008년 그의 주저 중 하나인 포스트모던을 이끈 열 개의 규범적 건축 : 1950~2000Ten Canonical Buildings : 1950~2000을 발표합니다. 이 책은 20세기 후반 건축의 전회를 가져온 열 개의 건축을 분석해 현대 건축이 어떻게 발달해 왔는지를 설명합니다. 그는 역사적 흐름을 바꾸는 계기, 그 과정을 거쳐 새로운 흐름의 기준이 되는 어떤 것을 규범적인canonical 것이라고 지칭합니다. 이 책의 서문을 쓴 스탠 알랜Stan Allen, 1956~은 규범적인 것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정리합니다.

 

아이젠만이 말하는 규범적인 것이란 건축의 주변부나 중요해 보이지 않은 순간에 발생하는 자유로운 일탈이다. 다시 말해 혁신은 기존의 주변부에 있던 것들이 체제 안으로 흡수되면서 발생하는 것으로, 내부에서 조종하여 그 체제의 논리를 바꾸는 것이다.”

피터 아이젠만, 포스트모던을 이끈 열 개의 규범적 건축 : 1950~2000

 

피터 아이젠만이 말하는 규범 또는 혁신은 비제도권에 속하던 것이 제도의 범위, 공식적으로 인정되는 인식의 장으로 들어오는 것을 뜻합니다. 혁명은 변방에서 시작된 것이 중심을 치는 것입니다. 건축의 발전 과정에서도 분명히 그런 부분들이 있습니다. 작지만 새로운 시도들이 건축의 주류적 경향을 전복시키고 흐름을 바꾸는 경우가 간혹 발생합니다. 그의 책이 갖는 의의는 건축에서의 혁신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검토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피터 아이젠만의 책의 가치에 의문을 가지고 있으며, 그의 연구는 건축이 진보하는 원인을 뚜렷하게 밝히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아이젠만이 연구의 범위를 건축 형식의 발달 과정으로 한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의 건물이 지니는 기능, 구조, 유형건물의 도구성은 건축 분야에서 그 건물의 중요성을 이해하는 기준은 아니며, 그런 것들이 그 건물의 중요성의 측면으로 여겨질 수도 없다. 중략 이 책에서 소개하는 열 개의 건축물은 그 건물이 정의하고자 하는 논지, 즉 텍스트적·형태적·개념적 전략을 정밀 독해함으로써 파악할 수 있는 논지의 받침점에 놓이게 될 것이다.”

피터 아이젠만, 포스트모던을 이끈 열 개의 규범적 건축 : 1950~2000

 

건축의 모습을 규정짓는 요소 중에서 기능적이거나 사회, 문화적인 부분은 이 연구에서 배제되었습니다. 건축에 내재된 무형적인 가치도 마찬가지입니다. 거칠게 말하자면 그의 연구는 건축의 형태를 텍스트의 구문론적으로 해석하고 건축 역사에서 전후 변형 관계만을 추적할 뿐입니다. 물론 특정 사안과 관련된 모든 변수를 감안해서 연구하는 것은 너무나 방대한 작업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다기한 주변 요소를 걷어 내고 하나에 집중하는 것은 연구의 방편으로 당연한 일입니다. 다만, 단편적인 연구의 가치는 이러한 수백, 수천의 단편적인 연구 결과들이 서로 얽히고 관계를 맺음으로써 산출되는 새로운 연구 결과의 도출에 있을 뿐입니다.

뒤집어 말하면 좁은 범위에 한정된 연구 결과는 그 결과의 가치도 제한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검토의 범위를 형식에만 한정한다면 그 연구는 형식의 문제만을 풀어낼 수 있을 뿐입니다. 건축에 영향을 미치는 주변의 변수를 모두 배제한 채, 상수만을 관찰하는 것은 실제 변화의 동인을 밝혀내기 힘든 극히 편협한 기획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건축 설계 작업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건축의 외형에 침잠한다면 그 작품의 가치도 외형에서만 드러나게 됩니다.

지금 우리 건축계의 문제도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건축을 바라보고 평가하는 기준이 건축의 형식에 과도하게 치우쳐 있습니다. 건축의 외형에서 느껴지는 미감이나 참신성이 건축을 관찰하고 평가하는 가장 중요한 관점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이고, 건축의 형식과 그 내부에서 이루어지는 인간의 삶과의 관계를 계획의 주제로 삼는 건축가는 많지 않습니다.

현대 건축의 밑바탕이 되는 모더니즘 건축은 그리스-로마 시대의 미술과 건축을 이상향으로 삼는 유럽의 고전주의 중심 교육인 보자르Beaux-Arts식 교육의 한계를 인식함으로써 태동했습니다. 1648년 설립된 프랑스의 미술 학교인 에꼴 데 보자르ole des Beaux-Arts에서는 파르티Parti, 에스키스Esquisse, 마르쉬Marche의 세 단계 과정으로 건축을 가르쳤습니다. 파르티는 창조적인 개념의 정립, 에스키스는 그 개념을 나타낸 스케치이며, 마르쉬는 스케치를 바탕으로 일정 법칙에 따라 도면화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 프로세스는 창조성을 강조하는 지금의 설계 과정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모더니즘 건축의 주창자들이 보자르식 교육을 비판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당시 금과옥조로 여겨지던 고전주의 세계관의 한계 안에서 창조가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창조적인 개념을 정립하는 단계인 파르티에서 그리스-로마 시대의 건축 형식은 반드시 준수해야 하는 황금률 같은 것이었습니다.

모더니즘 건축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르 코르뷔지에Le Corbusier, 1887~ 1965는 과거의 답습을 지양하고 새로운 건축으로 세상을 바꾸려고 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건축론인 건축을 향하여Vers une Architecture에서 기술의 발전에 따른 새로운 삶의 기대와 시대 정신의 실현을 위한 새로운 건축 그리고 그 수단으로서의 건축 체계를 제안합니다. 그것은 필로티Les pilotis, 옥상 테라스Le toit-terrasse, 자유로운 평면Le plan libre, 수평창Le fenre en longueur 그리고 자유로운 파사드La fade libre의 다섯 개의 원칙으로 구성되는 건축시스템, 즉 모더니즘 건축의 5원칙이라고 불리는 새로운 건축 체계였습니다.

르 코르뷔지에가 그의 이데올로기를 가장 완벽하게 녹여 넣은 작품인 빌라 사보아Villa Savoye가 지어진 지 90여 년이 흘렀습니다. 르 코르뷔지에가 제안했던 시대 정신의 구현을 목표로 한 건축 체계는 또 다른 형식, 또는 스타일로서의 도그마로 전락했습니다. 20세기 후반의 혁신적인 건축가 렘 콜하스Rem Koolhaas, 1944~가 제안한 건축 체계도 비슷한 길을 걸었습니다. 그의 건축 이론은 현대 건축의 세계적 흐름을 바꾸어놓긴 했으나 그의 생각이 가장 충실하게 반영된 1997년의 작품 에듀케토리엄Educatorium의 충격 이후, 지금은 그가 제안했던 건축 개념과 미래 사회의 통찰은 사라지고 그의 건축 어휘, 즉 건축의 형식만이 확대, 재생산되고 있습니다.

합회유리合會有離, 생자유사生者有死라고 합니다. 모인 것은 언젠가 흩어질 수밖에 없고, 태어난 것은 소멸할 수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원점으로의 회귀는 불가피하고 절대적인 것인가 봅니다. 2020년 현재, 세계의 건축은 다시 보자르식으로 회귀하는 듯합니다. 한국의 건축은 더합니다. 건축의 형식이 가장 중요한 요소로 인식되고 있으며, 그 다음이 부동산으로서의 가치입니다. 그 외의 요소들은 평가 대상이 되지 못합니다. 건축 설계 공모에서 경쟁작과의 차별화를 목표로 제안하는 설계 개념은 외형의 추상성에 머무르거나 계획의 발전 과정에서 폐기되기 일쑤입니다. 복합적이어야 할 건축은 단편적인 층위의 텍스트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외형에서 느껴지는 미감은 건축이 지니는 가치 중 극히 일부에 불과합니다. 단편적인 가치를 가지는 것은 수명이 짧은 반면 다의적인 것은 오랫동안 생명력을 유지합니다. 그러므로 건축은 깊어야 합니다. 건축은 다른 문화에서 건너온 사람들, 다른 시간에 존재하는 사람들에게도 다양한 가치와 해석의 기회를 제공할 수 있어야 합니다.

모든 문화적 산출물은 중층결정overdetermination되는 것입니다. 여러 문화적 요소들이 겹쳐져 서로 영향을 미치고 변형됨으로써 또 하나의 새로운 문화로 탄생하며 예외는 없습니다. 건축이 지니는 의미의 층위도 같은 과정을 거쳐 생성됩니다. 다만, 적층의 두께와 가치의 무게는 건축가의 의지와 노력에 비례합니다. 하나의 건축 작품이 가지는 깊이는 이로써 결정됩니다.

 

건축의 풍부함

 

문화의 복합적인 성격을 설명하기에 층위, 두께, 깊이라는 단어는 그 의미를 전달하는 데에 충분치 못합니다. 저는 앞으로 이 세 가지 의미를 아우르는 단어로 풍부함을 사용하고자 합니다. 풍부하다는 것은 사전적인 의미로는 넉넉하고 많다는 것이지만 딱히 그 의미로 한정해서 쓰이는 말은 아닙니다. ‘풍부한 맛이라는 표현에서 풍부함이란 그것을 구성하는 요소 간 관계가 매우 복합적이어서 따로 떼어 설명하기 어려우나, 결과적으로 양과 질에서 만족스럽다는 뜻입니다. 수년 전, 음악을 전공한 지인에게 바흐의 음악을 묘사해 달라고 부탁했을 때 그는 풍부하다는 말 이외의 다른 표현은 불가능하다고 했습니다. 다양하다, 아름답다, 멋지다, 흥미롭다, 숨겨진 무엇인가가 있는 것 같다이런 표현을 뭉뚱그려 사용하는 것보다 포괄적이며, 제가 전하고자 하는 의미를 가장 정확하게 전달하는 단어가 풍부하다가 아닐까 합니다.

건축은 열린 텍스트입니다. ‘건축이라는 범위를 엄밀하게 한정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듯, 인류 역사와 함께 발전해 온 건축의 텃밭에는 건축과 무관한 듯 보이는 다양한 문화와의 이종 교배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저는 여기서 건축과 그 주변 문화와의 관계성을 읽어보려고 합니다. 그리고 읽기의 범위를 건축학적 근거와 학문적 엄밀함에 가두지 않을 생각입니다. 학문은 그 성립 과정에서 스스로의 범위를 한정하고 그 외부의 것에 대해서는 배타적일 수밖에 없는 기본적 속성을 지니게 되기 때문입니다. 일상의 건축에서 우리의 삶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부분 중에서는 건축학이라는 거친 그물로 포집되지 않는 것들이 많습니다. 학문의 과정에서 관찰 대상은 비교 불가한 개개의 특성이나 목적하는 연구 분야 외부와의 관계성은 말끔하게 소거되어 표준화된 모델이 되기에 그렇습니다.

이 책에서는 건축학에서는 잘 다루지 않는 인간의 삶과 관련된 것을 다루고자 합니다. 그것은 일상에서 마주치거나 아니면 일상에서조차도 잘 감지되지 않는 소소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작고 가벼운 것에 대한 관심의 끈을 놓지 않음으로써 건축의 풍부함을 읽을 수 있습니다.

 

삶의 조건으로서의 도시와 건축

 

미국의 사회학자 리처드 세넷Richard Sennett, 1943~은 저서 살과 돌 Flesh and Stone에서 신체의 감각과 육체적 삶의 자유는 인간의 역사를 통해 변천되어 온 것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너무나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건축과 도시의 풍경도 인간이 창조한 제도, 기술, 문화 등과 함께 변화해 왔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스스로의 환경을 창조해 왔듯이 도시와 건축은 가소적인 우리의 삶을 특정한 모습으로 고정합니다. 인간과 건축은 각각 서로의 모습을 규정하는 이중적인 역할을 담당하는 것입니다. 시리아의 건축가 마르와 알 사부니Marwa al Sabouni, 1981~는 저서 삶의 보금자리를 위한 전투The Battle for Home에서 리처드 세넷과 같은 시점에서 자신이 목격한 도시와 건축 그리고 인간의 상호작용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알레포Aleppo, 다마스쿠스Damascus에 이어 시리아Syria의 세 번째로 큰 도시로 2000년의 역사를 가진 도시 홈스Homs에서 태어난 마르와 알 사부니는 2011년 시리아 내전이 발발한 이후에도 고향을 떠나지 않고 같은 장소에 머무르고 있습니다. 청소년기로부터 건축가로 성장하는 삶의 전반기 동안 그녀는 고향 홈스에서 생활하면서 사회의 변화와 함께 도시의 모습이 바뀌고 그 도시가 사람들의 마음에 영향을 미치는 모습 그리고 그 마음이 전쟁을 일으켜 결국에는 스스로 자신들의 도시를 파괴하는 파멸적 연쇄 과정을 모두 지켜봤습니다.

그녀는 지난 10년간 다수의 시민을 피란길로 내쫓고 불행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은 참혹한 시리아 내전의 원인이 건축에 있다고 말합니다. 차이에 대한 관용이 용인되었던 과거의 홈스에서는 차별이 심하지 않았으며 사람들은 각기 다른 모습으로 공존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외세의 지배와 자본의 유입에 의해 도시는 역사성을 망실한 회색의 획일적인 공간으로 변해갔으며, 부자와 가난한 자를 공간적으로 분리함으로써 파벌이 생기고 갈등이 고조되었다고 설명합니다. 인간의 잘못된 생각으로 만든 도시가 사람들의 사고 방식을 부정적으로 바꾸고 결국 사회에 커다란 재난을 가져다준 셈입니다.

 

많은 이유들로 인해 시리아 내전이 일어났지만 우리가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정체성과 자존감 상실, 도시의 특정 영역의 분리와 잘못 설계된 비인도적 건축물이 파벌과 분단 그리고 증오를 키우는 데 기여했다는 것입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하나였던 도시는 도시 중심가와 이를 둘러싼 빈민가로 바뀌었습니다. 그 결과로 하나였던 지역 사회도 분리된 사회 집단으로 바뀌었습니다. 개인은 서로를 배척하고 나아가 지역끼리도 배척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보기에 시민들이 지역에 대한 소속감과 타인과 공감하는 마음을 잃어버렸기에 도시를 파괴하기가 훨씬 더 쉬웠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마르와 알 사부니, 테드 서밋(TED Summit 2016)

 

그녀가 말하듯, 우리 손으로 만든 건축은 우리의 삶을 규정합니다. 현대 도시 환경에서 발생하는 큰 문제들 중 하나는 거주의 주체와 환경의 구축을 담당하는 주체가 동일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생활의 주체와 빌더의 구분 그리고 역할 분담이 사회를 통해 이루어지고 그 이해관계로 인해 생활의 주체가 삶의 공간을 선택하거나 바꾸는 것이 어렵게 됩니다. 생산의 주체가 생산의 목표에 기여할 수 없을 때, 삶의 주체가 삶의 수단을 선택하거나 바꿀 수 없을 때, 이것을 칼 마르크스Karl Marx, 1818~1883소외라고 말합니다. 그는 생산 수단(하부 구조)의 발전에 따라 상부 구조(사회, 문화)가 바뀌어 간다고 말했습니다. 안토니오 그람시Antonio Gramsci, 1891~1937는 한 발 더 나아가, 상부 구조가 하부 구조의 발전을 따라가지 못하는 경우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던 사회 문제가 발생한다고 말했습니다.

 

인간은 자신의 삶을 사회적으로 생산하는 가운데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필연적으로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맺게 된다. 다시 말해서 주어진 물질적 생산력(생산 수단)의 발달 수준에 부응하는 생산 관계(사회) 속으로 들어간다. 이러한 관계의 복합이 사회의 경제적 구조를 구성하고, 이 실질적 하부 구조를 토대로 그 상층에 정치적·법적 상부 구조가 세워지며, 또한 실질적 하부 구조에 부응하여 의식이 사회적으로 형성된다. 중략 이 생산 관계는 생산력 발달의 한 형태로부터 그 생산력에 대한 장애로 바뀌게 된다. 중략 경제적 하부 구조의 변화와 더불어 거대하게 드리워져 있던 상부 구조도 변혁되고 다소 빠르게 붕괴한다.” 안토니오 그람시, 옥중수고

 

한국 사회는 복합적인 사회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가장 큰 원인은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급격한 산업 구조의 변화와 이것에 부합하지 못하는 사회 구조, 이 둘의 괴리가 아닌가 합니다. 1960년대까지 한국의 주력 산업은 농업으로 1차 산업이 국가의 기간산업이었습니다. 하지만 단 40년 만에 한국의 산업 구조는 3차 산업 중심으로 재편되었습니다. 너무나도 빠르게 산업 사회로 진입한 탓에 성리학 중심의 근세 관료 국가가 지니는 인습의 혁파는 제대로 진행되지 못했으며, 그 잔재는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근세적인 모습과 공장제 생산, 서비스 산업에서 요구하는 인간형을 동시에 지니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제대로 된 근대화를 겪지 못한 까닭일 것입니다. 근대화 초기에 생산 수단과 그것에 맞는 법 제도를 선진국으로부터 들여왔지만 그 이후로부터 현재에 이르는 급속한 생산 수단의 발전을 사회와 문화가 따라잡지 못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한국 사회는 현재의 산업 구조에 걸맞는 사회 구조를 형성하기도 전에 4차 산업혁명이라고 불리는 새로운 생산 체계로의 이행을강요받고 있습니다. 앞으로 드러날 사회 문제는 이러한 격차와 무관하지 않을 것입니다. 건축 문화도 예외일 수 없습니다. 여기서 드러날 내부 갈등 및 문제를 미리 예측하고 개선하기 위해서는 참조할 선례가 필요합니다. 비슷한 시기에 서구 문물을 도입했고, 우리와 동일하게 급속한 근대화를 겪었으며 비슷한 풍토와 종교적 배경을 지닌 일본의 사회와 문화 그리고 여기서 파생된 건축이 우리에게 좋은 본보기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근대화의 명과 암이 모두 담긴 현대 일본 건축

 

통상적으로 일본의 근대화는 1868년의 메이지 유신明治維新으로부터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최근에는 일본 근대화의 기운이 그 훨씬 전부터 싹텄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습니다. 메이지 유신 이전에 일본의 사회 내부에 자본주의와 산업 사회의 기틀이 마련되었으며, 그것은 다음의 두 가지 정치적·사회적 변화의 결과였습니다.

첫째는 서구 문명과의 적극적인 교류입니다.

15세기 유럽의 대항해 시대에 중동을 거쳐 아시아로 전래되기 시작한 서구 문물은 번주藩主였던 다이묘大名들에 의해서 적극적으로 수입되었습니다. 무로마치室町 막부 말기의 전국 시대묌벌時代는 지방의 다이묘와 사무라이들이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군웅할거 하던 시기였으며, 번주들은 명분이 아닌 실력을 통해서만 자신의 영지인 번을 지킬 수 있었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경제적 번영과 군사력 증강을 꾀했습니다. 당시 해양 강국이었던 네덜란드와의 교역은 앞선 무기 제조 기술을 도입함과 동시에 경제적 부를 일으켜 권력을 공고히 다지는 일거양득의 수단이 되었기 때문에 각 번주들은 앞다투어 네덜란드와 접촉해 그들의 문화를 도입하고자 노력했습니다. 네덜란드의 과학과 문화는 에도 시대江戶時代에 이르러 난학蘭學이라 불리는 독립된 학문으로 정립되어 활발한 연구 및 학습 활동이 일어났으며, 일본은 난학을 공부한 학자들, 이른바 난학자들의 가르침을 통해 근대 사회의 기초를 닦게 됩니다. 이렇게 선진 과학 기술과 새로운 산업 시대의 윤리는 일본 사회에 자연스럽게 흡수되었습니다.

둘째는 분배의 촉진과 상공업의 발달입니다.

전국 시대가 종말을 고하고 1603년 도쿠가와 이에야스뤦川家康가 정권을 잡으면서 개막된 에도 시대를 일본 문화의 황금기라고 합니다. 전 주일대사관 1등 서기관이자 일본의 근대화 과정과 관련된 저술 활동 중인 신상목1970~은 이 시기에 급격한 발전을 이룬 주된 요인으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새롭게 시행한 정책인 천하보청天下普請과 참근교대꽝勤交代를 지목하고 있습니다. 당시 최고 실력자인 쇼군將軍과 다이묘의 관계는 신권神權을 이어받은 국왕과 영주의 관계로 이루어지는 유럽의 봉건 제도와 달랐습니다. 쇼군은 다이묘 중 하나였으며, 그중 가장 강한 존재였을 뿐입니다. 다이묘에게는 충성의 맹세와 쇼군이 요청할 때 군을 동원할 의무만이 주어졌습니다. 명분상 다이묘의 군사력 강화는 쇼군에게 이로운 것이었기에 쇼군은 다이묘를 견제하기가 용이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견제 방책으로 참근교대와 천하보청을 시행했습니다.

참근교대는 다이묘와 그 가솔들을 일정 기간 에도에 머무르게 하는 일종의 인질 정책입니다. 다이묘는 수행원들과 가솔과 함께 일정 기간 에도에 머물러야 했기에 일년에 두 차례씩 에도와 영지 간을 이동해야 했습니다. 지금처럼 교통이 발달했던 시절이 아니었기 때문에 여정은 수개월이 소요되었고, 수백, 수천 명에 달하는 수행원들이 함께 이동했기 때문에 많은 경비가 소요되었습니다.

 

참근교대 제도로 인해 가도와 역참이 정비되었고 다이묘 행렬이 소비하는 방대한 비용에 의해 경제적 번영의 기틀이 마련되었다. 동시에 다수의 다이묘 수행원이 지방과 에도를 왕래했기 때문에, 그들을 거쳐 에도의 문화가 전국에 퍼지는 효과를 달성했다. 예를 들면 덴포 12(1841) 기슈 도쿠가와가(紀州川家) 11대 번주 도쿠가와 나리유키()의 참근교대에서는 부시 1,639, 인부 2,337, 103필을 거느렸다. 중략 고산케인 기슈번의 다이묘 행렬 등은 격식과 권위를 실감하게 하는 대 행렬이었기 때문에, 수많은 농민이 구경하러 찾아올 정도였다. 이 제도에 의한 경제적 효과나 문화적 효과는 대단히 커, 에도 시대 사회 질서의 안정과 문화의 번영을 이룩하게 되었다. 위키피디아

 

이렇게 지출된 다이묘의 부는 주변 상공인의 소득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뿐 아니라 에도의 발달된 문화도 같은 과정을 통해 지방으로 전파되었습니다. 참근교대는 부와 문화의 전달 매개체로 기능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다이묘라는 재향 지배층의 의무적 소비 지출 증가가 상인 및 도시노동자 계층의 소득으로 흡수되는 현상은 현대적으로 말하면 일종의 낙수효과(trickle down effect)’가 발생했다고 할 수 있다. 다만 현대의 낙수효과가 부유층의 조세 부담을 경감시켜 간접적으로 소비 지출 증가를 유도하는 논리임에 반해, 참근교대는 부유층의 의무적 소비 지출을 확대했다는 점에서 부의 환류 및 경제 활성화에 더 직접적이고 확실한 효과가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신상목, 학교에서 가르쳐주지 않는 일본사

 

신상목에 따르면, 천하보청은 다이묘들로 하여금 세금 대신 공공재를 축조하도록 한 것으로 지금으로 말하면 SOC, 즉 사회간접자본으로서의 공공사업을 다이묘들로 하여금 직접 시행하도록 한 것입니다. 다이묘의 충성도는 공기 준수와 공사의 완성도로 평가되었기 때문에 그들은 최선의 노력을 다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이에 따라 기술자들의 능력이 높게 평가되고, 건설 자재와 기술이 번 간에 활발하게 거래되었습니다. 이 정책은 토목, 건축 기술의 발전과 함께 경제가 성장하는 데에도 큰 도움이 되었음이 분명합니다.

참근교대와 천하보청으로 인한 부의 분배와 문화의 전파는 상업과 문화의 발달을 촉진시켰으며, 거의 동시대에 이루어진 서구 문물의 수입은 이것을 가속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로 이루어진 상업과 문화의 발달은 학문과 기술의 성장과 앞으로 도래할 산업 사회의 토대를 구축하는 결실로 이어졌습니다. 부의 축적에 따른 상공인들의 사회적 지위 상승은 무사 중심의 봉건적 신분 서열을 차츰 무너뜨렸습니다. 이렇게 시작된 근대화의 흐름은 1868년에 이르러 막번 체제를 해체시키고, 종국에는 메이지 유신이란 변혁을 불러와 일본을 근대적 생산 수단이 작동하기에 적합한 사회 구조로 급진적으로 탈바꿈시키게 됩니다. 이렇게 본다면 그들은 약 300년의 근대화 과정을 겪은 셈입니다.

역사의 발전은 선형적이라기보다 비선형적이며, 인과에 따르기보다는 우연에 기인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선의가 질곡의 역사로 이어지기도 하는 등 미래는 예측하기 어렵습니다. 역사는 발전과 부작용 그리고 치유의 역사입니다. 일본은 우리에 앞서 오리엔탈리즘orientalism의 왜곡된 인식을 지닌 유럽과 교류하고 경쟁하며 서구의 문화를 흡수하기 시작했으며, 유교적 관습을 가지고 있는 아시아의 국가로서는 가장 먼저 근대화의 성장판을 열었습니다. 그 결과 서구화에 따른 지역성의 상실, 산업화에 따른 환경 파괴, 개인의 소외 등 선진 산업 국가가 겪는 성장통을 우리보다 앞서 겪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들 나름의 치료법을 찾으려고 노력했습니다. 생산 수단의 발전과 마찰을 일으키는 개인의 삶, 급격한 서구화와 전통의 계승 간 충돌을 주제로 담론을 생산했으며, 그것을 통해 상처를 치유하고 문제를 해결해 왔던 것입니다.

일본의 현대 건축에는 급격한 근대화의 부작용에 따른 고통스러운 경험과 그것의 해법이 녹아들어 있습니다. 건축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프리츠커상Pritzker Architecture Prize의 수상자를 2020년 현재 일곱 명이나 배출한 저력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데올로기가 주도하는 거대 담론이 사라지고 변방의 주체성이 강조되는 지역주의 건축이 주목받고 있는 지금, 일본의 건축이 세계적으로 각광받고 있는 이유는 서구의 건축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그들 건축만의 특이성 때문만은 아닙니다. 그것은 오히려 지극히 보편적인 화두, 말하자면 사회의 가장 작은 단위이자 삶의 주체로서의 개인, 이들이 모여 만드는 가장 작은 집단인 가족, 이 집단들이 모인 사회에서 발생하는 문제들을 다루었을 뿐만 아니라 근대화를 겪은 아시아 국가들이 공통적으로 안고 있는 전통성 계승의 문제를 고민하고 그들 나름의 답을 현대적 건축술로 구현하려고 노력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과정을 통해 세계 보편적이면서도 일본만의 향취를 자아내는, 그리고 현대 사회가 직면한 문제들의 다양한 해법이 고려된 건축을 고안해 내었으며, 이것이 지금 빛을 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콘크리트 vs 콘크리-

 

콘크리-コンクリート는 콘크리트concrete를 카타카나로 음차한 것입니다. 시멘트와 골재를 수화 반응을 통해 단단히 굳혀 만드는 회색의 콘크리트는 현대 건축에서 가장 보편적으로 사용하는 재료로, 1849년 프랑스의 조제프 모니에Joseph Monier, 1823~1906가 세계 최초로 철근 콘크리트 공법을 개발한 이래 세계에서 가장 사랑받는 건축 재료가 되었습니다. 일본에서는 1916년 서구에서 철근 콘크리트 기술을 입수해 처음으로 건설 현장에 적용한 이후 가장 흔하게 사용되는 건축 재료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일본의 콘크리트에 대한 인식은 서구 또는 우리의 그것과 조금 다른 점이 있습니다.

같은 건축 재료라 할지라도 나라와 민족에 따라 각기 다른 구법으로 사용하듯, 일본의 콘크리트 사용 구법과 그 결과물의 질은 한국의 콘크리트 그리고 서구의 concrete와 같지 않습니다. 일본은 서구에서 수입한 콘크리트의 물성을 그들 나름의 기준으로 재해석하고 여기에 맞는 공법을 개발해 건축 공사에 적용했습니다.

일본의 건축 디자인에도 이와 유사한 측면이 있습니다. 건축담론과 공간 디자인 원리는 서구에서 앞서 생성한 것을 바탕으로 하나 건축으로 만들어진 결과물은 언제나 일본 고유의 특질을 지닙니다. 그래서 저는 그들만이 가지고 있는 건축적 특질을 콘크리-토라고 통칭하고 특정하고자 합니다.

이 책의 목표는 현대 일본 건축과 그 탄생의 배경이 되는 일본 고유의 문화를 비교·검토함으로써 콘크리-, 즉 일본 건축만이 지니는 특성의 근원을 찾아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첫 번째, 다도茶道, 카츠라 리큐 그리고 건축

1. 네즈 뮤지엄 2009 쿠마 켄고

 

두 번째, 헤이세이平成 시대의 건축

1. 21세기 뮤지엄 2004 SANAA

2.  트리네스하우스  2017 히라타 아키히사

3. KAIT workshop 2008 이시가미 준야

4. NA하우스 2011 후지모토 소우

5. 도와다 아트센터 2008 니시자와 류에

6. 사이타마현립대학 1999 야마모토 리켄

7. 소네이지 파빌리언 2014 SANAA

8. 센다이 미디어테크 2001 소마 모두의 집 이토 도요